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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5일 (화) 15:45
지승도 교수의 인공지능 이야기

눈은 아직 남았는데 어디에서 봄을 찾으랴.
초당 남쪽 매화 가지에 꽃이 막 피려하네.

  
▲ 눈발을 헤치며 매서운 의지를 머금은 매화
  
▲ 서릿발 기상을 품고 거듭난 매실

 

 

 

 

 

중국시조 <설중매>의 일부이다. 부지런하고 강인하면서도 기품 있는 매화는 선비정신의 상징이다. 지금은 유월초. 아직 봄기운은 남아 있건만 매화는 어느새 매실로 거듭난다. 서릿발처럼 매서웠던 의지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으랴! 부지런히 피고 지고 결실 맺고 떨어져서 거름되고... 참으로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모습이 자유롭고 멋져 보인다. 허면 우리네 삶은 어떠한가? 어느 노스님이 젊은 수행승에게 묻는다.

“뭘 하고 있느냐?”
“예. 깨달으려고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깨닫겠느냐?”
“???”

몇 년 뒤
“뭘 하고 있느냐?”
“예. 깨달으려고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깨닫겠느냐?”
“???”

몇 년 뒤
“뭘 하고 있느냐?”
“예. 깨달으려고 경전을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깨닫겠느냐?”
“??? ... ”

  
▲ 스승은 제자에게 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집착 없음을 통해 답 없는 답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끔 일깨워주는 것이다. 바른 뜻으로 바른 결실을 맺으라는 것이다. (사진은 법정스님(1932~2010))
가끔씩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묻는다.

“자네는 이 자리에 왜 앉아 있는가?”
“공부하려고요”

“공부해서 뭐하게?”
“취직 해야지요”

“취직을 왜 하는데?”
“돈 벌어야죠”

“돈은 왜 버는데?”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야죠”

“가정은 왜 꾸려야 하나?”
“그냥 그래야하는 거 아닌가요? 뭘 그렇게 자꾸....”

노스님은 과연 답을 알고 있을까? 학생에게 질문하는 필자는 정작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얘길까? 대체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아마도 스승은 제자의 좁은 견해, 즉 편견을 깨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단편적인 행위가 아니라, 깊이 느끼고, 고민하고, 사유하고, 성찰하면서 좀 더 본질에 걸맞게 행하라는 뜻일 것이다. 행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행위를 멈추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온전한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일회적인 답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답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끔 일깨우려는 것이다. 사실 답이란 것이 별도로 정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언젠가 변할 것이다. ‘~~ 때문에’, ‘~~을 위해서’라는 조건이 붙을 때, 우리는 순수할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러울 수 없게 된다. 지혜로울 수 없게 된다. 조건적인 행위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뭘 하더라도 ‘그냥’ 하자. ‘너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돈 벌려고’, ‘깨달으려’ 등등 토 달지 말고 순리대로 그냥 하자. 그것이 본질적인 삶일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지 않는 진실한 삶일 것이다. 고은시인의 시 <사랑에 대하여> 일부를 음미해 보자.

높지 말 것
넓지 말 것
...
사랑은 작고 시시할 것
대자대비 아니오
박애 아니오
그저 사랑은 맹목의 그 사랑이오.

혹자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잘 살고 있는 사람한테, 왜 사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그냥 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고? 관념적인 삶과 지혜로운 삶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냥 살더라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비록 겉모습은 같을지라도 행복과 불행 사이가 천갈래 만갈래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냥 ‘산은 산, 물은 물’과 ‘산은 산 아님, 물은 물 아님’을 거쳐 다시 ‘산은 산, 물은 물’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엔지니어 되기

우리나라가 변변한 자원도 없이 기술 강국의 반열에 오른 것은 온전히 엔지니어 덕택이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후 격동기에 우수한 인재들이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로 성장함으로써 단기간에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분들 덕택에 기술 강국으로 우뚝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1세대 엔지니어들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들이 마련해준 풍요 속에 안주하기에 현실은 너무나 냉엄하다. 많은 것이 변했다. 더 복잡해졌고, 더 치열해졌다.

화투판처럼(?) 냉엄한 첨단 기술 경쟁 속에서 진정한 타짜 엔지니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쌍피(2P)만 가지고는 어려워 보인다. 적어도 피가 네 개는 있어야 한다. 참된 엔지니어로 거듭나기 위한 네 개의 피(P)에 대해 살펴보자. 4P란 바로 Product, Project, People, Process이다.
  
▲ 엔지니어 교육을 위한 네 개의 P
I. Product (훌륭한 공학제품이란?)

Product란 말 그대로 생산품, 즉 물건, 제품이다. 과학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라면, 엔지니어의 목적은 훌륭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냥 물건이 아니라, ‘훌륭한’ 물건, 그래서 대박 날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일찍이 학문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함’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쓸모 있는 것”. 전에는 쓸모하나만 있어도 팔렸다. 제품이라는 것이 기능성 하나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한가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재미있으면서도 감성을 파고들지 않으면 안팔린다. 몇 일전 13세 수준의 인공지능시스템인 ‘유진’이 세계 최초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웠다는 것이다. 또래 수준의 상식은 기본이고 유머와 재치 그리고 감성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광한다. 물론 이전에도 IBM 왓슨처럼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한 인공지능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성뿐만 아니라 진짜 소년의 감성을 보이는 괴물이 출현한 것이다. 이성과 감성을 겸비함으로써 진정한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린 것 아닌가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연일 매스컴이 뜨겁다. 실제로 방대한 경우수와 정보들을 잘 가다듬고 조직화하여 마치 진짜 인간이 감성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예상 질문들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경우수별 모범답안을 마련한 뒤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시스템을 두고, 설령 그것이 아무리 그럴싸한 감성적 답을 내놓는다한들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시스템이 출현했다고 선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이라는 인공지능시스템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지식전달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뭔가를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인다.

  
▲ 세계 최초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시스템 ‘유진 구스트만’
이와 같이 ‘쓸모’에 덧붙여 ‘재미’를 찾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전적이고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것에 끌리는 우리들의 변화욕망 때문이다. 심지어 사랑조차 ‘변하는 거야’를 외치지 않던가! 지루한 것은 더 이상 못 참는다. 그렇다면 ‘감동’은 또 왜 필요할까? 아마도 변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변함없는 따뜻한 정이 그리워서일 게다. 한바탕 신나는 놀이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과 갈증을 해소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휴대폰 하나에도 감각적 디자인을 중시했던 스티브 잡스는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훌륭한’ 전자제품 시대의 서막을 연 그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뿐이다. 제2의 스티브 잡스를 꿈꾸는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해야 훌륭한 엔지니어가 될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훌륭함’의 이면에는 우리들이 알아야 할 본질, 즉 시스템적 특성이 자리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II. Project (어떻게 만드나?)

아무리 훌륭한 제품을 구상했다 해도 Project(프로젝트)를 통하지 않고서는 완성될 수 없다. 어떤 프로젝트에서 훌륭한 제품이 나올까? 프로젝트는 이제 팀 단위로 진행된다. 때로는 수직적으로, 때로는 수평적으로, 때로는 혼합적으로 구성된다. 때로는 민관군으로, 때로는 산학연으로, 때로는 다국적으로 구성된다. 어디 그뿐이랴. 인문, 예술, 정치, 윤리, 경제는 물론 기계, 전자, 컴퓨터, 화학, 생물, 재료 등 초협력적 팀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요즈음의 화두이다. 스티브잡스는 서로 다른 분야 간의 연결이 곧 융합이고 융합이 곧 창조라고 일찍이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고 팀만 잘 조직하면 무엇하랴. 관리가 엉망이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프로젝트 관리 즉 리더십이 더 중요해 보이는 이유다.

III. People (누가 하는가?)

인사가 만사라 한다. People(사람)은 프로젝트를 이끄는 결정적 주체이다.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다. 한명의 의사가 잘못하면 불과 몇 명의 환자가 다친다 하지만, 한명의 엔지니어가 실수하면 수백수천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훌륭한 프로젝트를 이끌며 훌륭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엔지니어란 과연 누구인가? 상위TOP10 대학 출신, 성적3.0 이상, 장학금 수혜 경험1회 이상, 토익 700점 이상, 봉사활동 30시간 이상, 에세이 발표 3회 이상, 경진대회 수상 경력 2회 이상, 자격증 2개, 해외연수 6개월에 인턴 6개월 끝!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 지셨습니까? 뭐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나요? 눈치 보지 않고 잘 노나요? 교과서 달달 외어서 아는 답 말고, 엉뚱하지만 자신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나요?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어리석게 남을 배려해 봤나요? 그러고도 생색 하나 내지 않을 수 있나요? 사는 일에 신이 나나요? 하는 일이 진정 돈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나요? 가치 있는 일이라면 정말 목숨도 걸 수 있나요? 뜨거운 눈물을 흘려봤나요?

어찌어찌 공부 잘해서, 소위 명문 대학 나와서, 머리 빨리 돌아 아이디어 내서 돈벌이 잘되는 사업에 성공했다 치자. 그가 곧 훌륭한 엔지니어일까? 이 사회가 그토록 원하는 바로 그일까? 혹시 인재(人才)가 아닌 인재(人災)는 아닐까? 공학제품은 양날의 검이다. 우리를 즐겁게도 하지만, 동시에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물론 명문대 나와서 돈 잘 버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만을 최고로 여기는 우리들의 편향된 가치관에는 문제가 있다. 전문성, 사업성, 창의성, 융합능력, 글로벌 리더쉽 등등 다 좋지만 그 보다 앞서 인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작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우리들의 근시안적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된 우리들의 외눈박이 사고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엔지니어, 사람다운 엔지니어, 모든 이들을 이익 되게 할 그런 훌륭한 엔지니어 어디 없을까?

  
▲ 엔지니어는 무엇을 먹고 자라나?
IV. Process (어떻게 기르나?)

왜 없겠나! 만들면 되지! (Process) 세계 최고의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IT시대를 펼친 선구자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기존의 교육방식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방해할 뿐이라고 독설을 날린 바 있다. 그는 경험과 실수 그리고 몰입할 수 있는 오락이야말로 자유롭고 새로운 사고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전해들은 것은 절대로 지식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직접 경험한 것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지식들은 일부러 기억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진정한 교육이란 정답보다는 엉뚱한 질문이 나오게 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정보주입이 아니라 사고하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게끔 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 말한다. 물론 옆집 할머니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결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뭘 하려는지 미리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연구가 아니라고까지 강변한다. 덧붙여 침묵이나 명상을 통해 자기 마음을 살피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 또한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살피는 일보다 자기 마음을 살피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잡스는 융합을 외친다. 특히 예술과 과학은 둘이 아니라고 줄기차게 강조한다. 융합적 연결이 곧 창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험과 실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외친다. 그래서 정해진 논리보다는 직관을 따르라 한다. 물건 하나라도 겉모습 보다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휴머니티를 강조한다. 그 또한 결론적으로 인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게이츠 역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중시한다. 아낌없이 주는 것을 통해 인격을 연마하라고 강조한다. 힘든 상황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수용의 정신과 적응력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역시 사람의 도리 즉 순리를 말하려는 것이다.

아직 어리지만 세계 최고의 아이디어맨으로 페이스북의 창설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부디 장난기를 잃지 말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남 눈치 보지 말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라고 주장한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도 재미없는 일은 못한다고 외친다.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얘기다.

요컨대 현대과학을 이끌었던 선구자들은 한결같이 교육의 핵심으로 인간성과 마음가짐을 꼽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이제 막 15살이 된 황상이 한숨 쉬며 스승인 다산 정약용에게 묻는다.

“저는 너무 둔하고 꽉 막혀서, 정말 답답한 놈입니다.”

다산이 답한다.

“공부하는 자에게는 큰 병통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외우기가 빠르면 그 폐단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며, 둘째 글짓기가 빠르면 그 폐단은 부실하게 되는 것이요, 셋째 이해가 빠르면 그 폐단은 거칠게 되는 것이다. 무릇 둔하지만 파고들고, 소통시키고, 닦아 내는 자는 그 빛이 윤택하게 되는 법이다. 파고드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함이다. 소통시키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함이다. 닦아내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함이다. 이 ‘부지런함’을 어떻게 다할 수 있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이백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요즘의 우리들, 너무나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우리들을 경책하고 있다. 영악한 생각과 가벼운 행동이 총체적 부실이라는 과보를 낳는다고 일깨우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호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답은 간단하다. 마음을 다스리면서 부지런히 살라는 것이다.

여러 선각자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을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창조적이면서도 올바른 그런 인간다운 엔지니어를 길러낼 수 있을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전부 싹 바꾸라고 이미 20년 전부터 외쳐왔다. 그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변화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의지 하나는 돋보인다. 아인슈타인도 발상의 전환 없이는 창조적 인재를 키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어느 교육학자는 현 교육 여건이 ‘19세기형 교수법, 20세기형 교수, 21세기형 학생’이라고까지 비꼰다. 정체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교육틀을 싹 뜯어 고치라는 것이다. 학교라는 곳을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전달의 공간에서 벗어나, 펼치고 즐기며 몸소 체험하는 공간으로 확 바꾸라는 것이다. 학교와 사회와 기업 간의 울타리도 낮춰야 한다. 국내와 해외 간의 장벽도 줄여야 한다. 문과니 이과니 전공분야간의 구분도 좁혀야 한다. 기술과 예술이 언제부터 구별되었던가? 불과 2~3세기전의 일이 아니던가! 예술이건, 철학이건, 문학이건, 공학이건 모두가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다양한 노력일 뿐이다. 통섭의 개념도 다원주의의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우리들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다양한 몸부림일 뿐이다.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는 우열과 차별이 아닌 다양성만이 존재한다. 모든 분야들이 하나였던 과거로 돌아가자. 보다 큰 가치 창조를 위해 벽을 허물어 원래대로 되돌리자. 이제 반쪽짜리 인간은 그만 길러내고, 정말 인간다운 인재를 길러야 한다. 다양성은 융합을 낳고, 융합은 이해를 기르고, 이해는 인간성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일찍이 교육의 아버지 페스탈로치는 인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았던가. 요즘같이 복잡하고 분업화된 세상에 무슨 이상주의적 궤변인가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세월호 참사와 같이 총체적 난국에 접하게 되는 오늘날 인성교육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은 과연 필자만의 호들갑일까? 부끄러움과 창피함마저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던가?

불교인식론 아비담마에 따르면 선한 마음 중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다고 한다. 부끄러움이란 스스로에 대한 것이고, 창피함이란 타인에 대한 것이다. 숫타니파타의 구절이다.

남을 화나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천한 사람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 이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각자들이 한결같이 언급한 바, 사람다운 삶의 전제조건이다. 그래야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야 부실한 결과를 낳지 않는 부지런한 사람, 인간다운 엔지니어가 나올 것이다. 그래야 지혜롭고 자유롭게 살면서, 모두를 이롭게 하는 훌륭한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길들이기

어찌해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어떻게 스스로의 마음을 제어할 수 있을까? 이미 알려진 바, 마음은 항상 대상을 만났을 때 일어난다. 조건 따라 일어났다 조건 따라 멸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어느 때건 대상과 마주했을 때가 바로 마음을 다스릴 절호의 찬스다. 성인들이 말하는 마음 길들이기 비법을 살펴보자.

I. Relax (이완하기)

  
▲ 빈센트 반 고호(1853~1890)의 <낮잠>. 뭐니뭐니 해도 뱃속 편한 게 최고!
번뇌는 긴장이다. 생각 자체가 곧 긴장이다. 아무리 사소한 마음일지라도, 결국엔 육체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서로 의지하여 일어났다가 의지하여 소멸한다. 따라서 (좋은 대상이건 나쁜 대상이건) 대상과 마주했을 때는 의도적으로 몸을 이완시켜보자. 그러면 마음도 덩달아 여유를 찾게 된다. 마음이 여유를 찾아야 비로소 마음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어하는 마음 따로, 제어당하는 마음 따로, 악한 마음 따로, 착한 마음 따로 등 이 마음 저 마음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육체적 긴장이 풀려야 앞에 일어난 마음을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알아차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야 마음을 지속적으로 잘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부끄러움과 창피함도 알 수 있게 된다. 반성과 참회도 할 수 있다. 그래야 인간답게 성장할 수 있다.

II. Breath-in, breath-out (들이쉬고 내쉬고)

  
▲ 오딜롱 르동(1840~1916)의 <감은 눈>
휴~~ 긴장이 완화되면 동시에 호흡도 느려진다. 반대로 호흡을 관찰하다 보면, 생각이 느려지고 동시에 긴장도 완화된다. 마음도 평온해진다. 고요함을 유지해야 마음을 살펴 볼 수 있고 그래야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호흡을 느리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마음이 길을 잃었을 때, (마주한 대상에 빠졌을 때) 의식적으로 자기 호흡을 지켜보면, 제 정신을 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일어났던 마음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래서 무슨 짓을 했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지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III. Let it go (보내주기)

  
▲ 에르바르트 뭉크(1863~1944)의 <이별>. 보내주면 그 뿐!
어떤 대상이건 붙잡지 말고 그냥 보내주자.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내 것은커녕 나 자신도 없다. 지금 인식된 대상은 그 무엇이건, 자연에서 왔으니, 온전히 자연으로 되돌리자. 그것을 붙잡으려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마음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마음은 대상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집착!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그래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것이다.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진인사 대천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한 뒤, 결과는 하늘의 뜻을 따른다) 지금의 대상에 (상황에) 대해 순리대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해 대처하라는 뜻일 것이다. 대신 결과에는 연연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과는 응당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일어날 대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찌되건 그 또한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그저 인연 따라 벌어지는 자연 현상일 뿐...

IV. Smile (미소)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 미소 하나면 끝!
연꽃을 든 붓다에게 미소로 화답한 제자 마하가섭은 역시 수제자답다. 아는 자는 말이 없다. 자유롭고 이완되고 고요하여 집착이 없다. 그러니 미소 지을 밖에... 모나리자는 미소 하나로 이미 무수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완하기’나 ‘숨쉬기’나 ‘보내주기’나 ‘미소짓기’나 결국은 매한가지다. 늘 깨어서 자기 마음을 살피라는 뜻이다. 앞서 살펴본 선구자들의 이야기와도 다르지 않다. 물론 쉽지는 않다. 우리는 늘 대상에 집착하고 생각에 휘둘려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엔지니어로 거듭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결코 못할 일도 아니다. 독자들께서도 네 가지 마음 길들이기를 꼭 실천해보라고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필자도 십년 넘게 노력 중이다. 물론 잘 안된다. 그렇지만 그리 실망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한다. 잘 하려는 것도, 못한다고 실망하는 것도 모두 집착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무엇엔가 집착하려는 욕망이 솟구칠 때마다 되뇌어 보는 중국 향엄선사의 게송으로 마무리한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었네.
올해의 가난이 진짜로 가난일세.
작년엔 송곳 꽂을 땅 하나 없더니
올해엔 송곳마저 없어져 버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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